節用과 소통, 포용의 정신 실천한 정치지도자의 典型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3월 9일 치러지는 역사적인 제20대 대통령선거가 29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대내외적으로 변혁기(變革期)에 그야말로 국가의 명운(命運)을 가를 국가 최고지도자를 뽑는 중차대한 선거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고, 앞으로 대처해야 할 과제가 그 어느 때 보다 엄중하고 녹록지 않기에 5년간 한국호(韓國號)를 이끌어갈 선장(船長)이 가져야 할 책임감과 능력은 실로 막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선(大選) 레이스에서 보여주고 있는 유력 여야 후보의 모습은 어떤가.

포퓰리즘 선심공약, 편가르기, 말 뒤집기 등 일일이 예를 들기 부끄러울 정도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여야 유력 대선후보의 포퓰리즘 말잔치, 선심공약의 일단(一端)을 살펴보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만 19~29세 청년에게 연간 100만 원의 청년기본소득 지급(7조원 소요 예상),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병사월급 200만원, ‘서울공략‘용 ▲지하철 1·2·4호선, 경부고속도로 양재~한남 지하화 ▲대규모 주택공급 등 수십조원대 토목공약(지난달 21일) 등.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임대인·임차인 국가가 3분의 1씩 나눠 부담, 아이 출생후 매월 100만원의 부모급여 지급, 사병 봉급 2백만원, 농업직불금 5조원으로 2배 확충 등,

이재명 여당 후보와 윤석열 야당 유력 후보가 하루가 멀다 하고 퍼주기 공약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뚜렷한 재원 대책도 없이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고 보자는 식이다. 더욱 가관(可觀)인 것은 상대방 것을 베끼거나 약간 손질해 내보내 누구의 어떤 공약이 진짜배기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원조(元祖) 김별을 해야할 판이다.

윤 후보가 지난달 19일 가상자산 투자수익에 대해 5000만원까지 비과세하겠다고 하자, 이 후보는 이틀 뒤 윤 후보의 공약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투자손실분에 대해 5년 동안 이월공제까지 하겠다고 약속했다. 윤 후보가 20일 오전 연말정산 기본공제액을 1인당 1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하자, 이 후보는 이날 오후 자녀세액공제를 2배 이상 늘리고 인적공제 연령도 26세로 확대하겠다고 했다. 한 후보가 퍼주기 공약을 내놓으면 다른 후보가 "그 공약 받고 얹어서 이것까지"라고 더 지르는 식이다.

재건축 용적률 상향 등 부동산 공약과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노선 연장·신설이라는 교통 공약도 판박이 공약의 대표적 사례다.

이 후보가 탈모치료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고 하자, 윤 후보는 당뇨환자를 위한 혈당측정기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고 했다. 이미 ‘문재인케어’로 적자 수렁에 빠진 건강보험을 아예 거덜 낼 태세다. 이런 퍼주기·베끼기 경쟁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윤 후보가 노령연금을 연 100만원으로 늘리겠다고 하자, 이 후보는 60~65세 장년수당을 연 120만원으로 증액하겠다고 맞받았다.

국가재정이 거덜 나든 말든 당장 환심을 사기 위해 퍼주기 공약을 남발하는 행태는 국민을 바보로 아는 처사다. 북한 비핵화와 한미동맹, 통상외교 등 안보 및 대외문제는 물론 노동시장 개혁 등 절박한 국가적 과제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소신 발언을 회피하거나 미약한 반응을 보이면서 표와 연결된 사안에만 매몰된 모습이다.

여기에 고질적인 편가르기마저 가세,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이번 대선을 '진영(陣營) 싸움'으로 정의하며 "걱정하지 말라. 안 진다"고 말하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진영싸움을 부추기는 상왕(上王)을 보며 개탄스럽다"고 응수했다.

일련의 대선판 흐름을 보면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가장 위대한 군주(君主) 세종대왕과 강희제(康熙帝)의 국가경영 리더십을 떠올린다.

비록 200여년 시차(時差)가 있긴 하나 두 사람 모두 한순간도 백성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풍부한 학식, 적(敵)을 내 사람으로 포용하는 관대함과 겸손함, 근검 절제하는 생활, 국경을 정비하고 단순 유학(儒學)이 아닌 다양한 학문에의 접근, 인재 발굴에 대한 열의 등 성군(聖君)의 표상(表象)이다.

한 사람은 조선의 위대한 성군으로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고, 또 한 사람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까지 비록 만주족이지만 가장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제왕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자면 그것은 바로 나보다 남을, 그리고 자신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고민했다는 점이다. 또한 위대함의 밑바탕에는 끝없는 정진(精進)과 자기 단련 그리고 치열한 자기 통제가 위대한 리더십으로 발휘된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확립, 4군 6진 개척, 영토 확립 등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세종대왕(재위 1418~1450).

세종이 이룬 이러한 많은 업적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성사될 수 없는 것이다.

세종은 자신이 펴고자 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관료들을 끊임없는 토론(討論)을 거쳐 설득해 지지자로 돌려세우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가 여진족 토벌에 대해 안건을 꺼냈을 당시 최윤덕(崔潤德) 장군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이에 그는 관료들에게 토론을 통해 최윤덕 장군이 제시한 반대 이유에 대한 대안을 찾도록 지시했으며, 결국 두 번째 정벌 회의에서 최윤덕은 찬성쪽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모든 전투 사항은 경(卿)의 처분대로 따르겠다"며 최윤덕에게 정벌에 대한 전권(全權)을 위임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세종이 추진한 조선시대의 세제개혁(稅制改革) 건이 있다.

세제개혁은 명재상 황희(黃喜)의 반대에 부딪혔다. 세종은 역시 계속된 토론을 통해 황희의 의견에 대한 대안(代案)을 찾도록 했고 심지어는 전국 17만호(戶)에 대대적 설문조사를 펼쳐 근거자료를 관료들에게 제출하기까지 한다.

결국 황희의 찬성을 얻어낸 세종은 "황희 말대로 하라"는 한마디와 함께 세제개혁을 실행하게 된다.

특히 ‘세종대왕의 조세정책’은 ‘세계사적 사건’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5세기 초 절대왕정시대에 많은 국민을 대상으로 여러차례 여론조사와 일부지역 시범실시를 거쳐 오랜기간 갈고 다듬은 끝에 정교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으니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공법(貢法)을 제정하기 위해 많은 준비와 조사·연구를 하고 논의를 거치는 데 들인 시간은 무려 25년.

세종은 백성을 위한 정책이므로 독단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과거시험에 공법 문제를 출제해 젊은 유생들의 의견을 들었고, 조선의 백성 4분의 1이 참여해 국민투표라 할 수 있는 공법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11년 동안 대신들과 논쟁해 민주시대보다도 더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공법을 완성했다.

세종은 초지일관의 마음으로 대신들과 논의하고 백성의 의견을 들어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원칙으로 하는 공법을 완성시켰다. 그 당시 조세는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종은 조세의 과학화와 선진화를 실현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여 백성들이 법으로 정해진 조세만을 부담함으로써 조세의 횡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세종은 또한 허조(許稠), 황희(黃喜), 장영실(蔣英實) 등 인재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잘 배치하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인재라 생각한 사람들의 결격사유를 탓하지 않고 재능(才能)만을 보았다. 이러한 세종의 믿음은 결국 그들이 스스로 결격사유를 치유해 가며 국가에 충성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릇 내 몸을 위하는 일은 모두 끊어버렸는데…”

‘세종실록’에는 경복궁 강녕전(康寧廛)을 수리하던 군인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다. 왕의 침전(寢殿)인 강녕전이 좁고 비가 새자 이를 수리하러 온 군인이 횡액(橫厄)을 당하자 세종은 위와 같이 탄식하며 슬퍼한 일화가 있다.

이외에도 조선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세종은 고통을 함께 하고자 2년 동안 경회루(慶會樓) 부근에 백성과 똑같은 초가집을 지어 생활했다.

세종은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할 때 항상 위험을 생각해야 한다며 평화 시 전쟁 위기에 대비하는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했다. 일부 중신들이 군사훈련이 백성에게 폐해를 끼친다고 걱정했으나 세종은 군국의 중대사는 작은 폐단이 있더라도 편안할 때 위력(威力)을 길러야 한다면서 상무(尙武)태세를 강화했다. 세종 원년 1418년 6월 왜구 침략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이종무(李從茂) 도제찰사가 지휘하는 227척 함선에 1만7000여 병사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했다. 세종은 재위 32년간 4군6진(四郡六鎭)도 개척하여 여진족을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만주로 몰아냈다.

세종30년 조선은 중앙군 2만8000명, 지방군 15만8000명으로 총 18만6000명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당시 500만명으로 추정되는 인구에 비해 큰 병력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약 230여 명 중 유일하게 ‘천년에 한번 나옴직한 제왕’이란 뜻의 ‘천고일제(千古一帝)’란 호칭을 얻은 청(淸)나라의 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1~1722). 그는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오랫동안 천하를 통치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중국 지도자들조차 가장 본받고 싶어하는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한 주인공이 된 것은 한 마디로 ‘피를 토할 정도로 노력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보위(寶位)에 오른 강희제는 왕자 시절부터 부지런하기로 유명했다. 오전 8시부터 공부를 시작해 끝나는 시간이 보통 저녁 8시일 정도로 학문에 정진했다. 이런 공부 습관과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은 황제가 되어서도 계속되어 단 하루도 책을 멀리한 적이 없었다.

강희제는 어린 황제를 능멸하고 권력을 농단하는 조정의 실력자들과 청의 개국 공신인 한족 출신 오삼계 등 세 번왕(藩王)의 반란 등 숱한 난관을 특유의 지혜와 결단력으로 돌파했다. 이어 타이완을 병합했고,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으면서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을 결정지었으며, 외몽고를 점령해 영토로 편입하고 티벳까지 굴복시켰다. 이로써 현재 중국 영토의 골격을 완성했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른 끝에 강희제는 이른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33년간의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 시대를 열기 위한 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만주어는 기본이되 전국 통치를 위한 ‘한족어’ 공부를 시작했다. 굳이 한자를 몰라도 되는 황제의 위치였지만 직접적인 통치를 원했던 그는 언어 공부부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명나라 출신 학자들은 청왕조를 철저히 무시했다. 고염무, 황종희 등 당대의 한족 유학자들은 청왕조의 부름도 거역했고 특히 이곽은 강희제가 친히 7번이나 찾아가 도움을 청했을 정도로 도도한 태도를 보였다. 강희제가 인재 발굴을 위해 실시한 첫 번째 과거시험에는 한족이 한 명도 응시하지 않았다.

이에 고심 끝에 천하의 인재를 얻고 민심을 얻기 위해 세금을 낮추고 ‘주접(奏摺)’이란 비밀통신조직을 만들어 관리의 부패와 만주족의 한족에 대한 탄압을 보고받고 이를 시정하는 일을 시행했다. 그리고 황하와 장강의 치수에도 온 힘을 쏟았고 무려 7번이나 강남을 순행하며 한족 유학자와 백성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조상이 멸망시킨 명(明)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사당을 방문해 절을 하기도 했다. 민심은 조금씩 강희제의 진심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절제와 청빈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나라 시절 궁궐에는 1만여 명이 넘는 환관과 궁녀들이 있었으나 대폭 줄여 400여 명만 남겼다. 침전을 직접 시중드는 내관의 숫자도 10여 명으로 줄였다. 당시 그가 자주 설파한 이야기는 ‘궁궐에서 쓰는 모든 비용은 모두 백성의 피와 땀이나 마찬가지이다. 황제인 나부터 근검절약해야 한다’였다.

한편으로 그는 다양한 학문에 넘치는 호기심을 보였다.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에 자유를 보장해 주는 댓가로 그들로부터 천문학, 수학, 과학을 도입했다. 한족 출신 유학자들로부터는 주자학과 유학을 배웠다. 드넓은 만주 땅을 달리던 만주족의 기상도 잃지 않았다. 틈틈이 사냥도 즐기는 등 무예에도 소흘하지 않았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성군의 모습을 갖추어가던 강희제는 이른바 통치의 이념을 정립했다. 그것은 공자와 맹자의 이론을 주축으로 한 ‘왕도정치’와 노장사상에 기반을 둔 이른바 ‘무위지치(無爲之治)’이다. 무위지치는 ‘다스리는 것을 백성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권력자나 통치자의 위세를 드러내는 권위의 정치보다는 제도와 원칙이 확고히 세워지고 그 룰 안에서 자연스럽게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강희제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4만9000여 자의 한자가 수록된 한자사전인 ‘강희자전’을 비롯해 수많은 서적과 기록을 남겼고 학문적으로도 유학에 치중하지 않았으며 불교, 예수회까지 아울렀다. 자유로운 무역을 보장,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새로운 부(富)의 창출까지 도모했다.

당시 강희제가 이끈 청나라는 국부(國富) 면에서 ‘태양왕’ 루이 14세의 프랑스보다 앞섰고 나라의 판도 면에서도 표트르 대제가 이끈 러시아에 버금갔다. 강희제는 그의 치세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강대한 나라의 최고경영자(CEO)로 61년을 이끈 셈이다.

강희제의 리더십에서 가장 돋보이는 개념은 ‘국궁진력(鞠窮盡力)’의 정신이다.

‘국궁'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구부린다는 뜻이고 '진력'은 온 힘을 다한다는 의미다. 강희제의 리더십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곧 '섬김의 지도력'의 전형이었다.

강희제는 백성들이 '안거낙업(安居樂業)' 즉 '맘 편안히 살면서 즐겁게 생업을 영위하게 하는 것'을 통치의 최고 가치로 삼았다.

강희제는 죽기 5년 전인 1717년에 쓴 '고별상유(告別上諭, 미리 쓴 유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의 세금을 낮춰 주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잘 다스리고, 관대함과 엄격함의 조화를 이뤄 나라를 위한 장구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

강희제는 ‘인재발굴’에 적극적이었다. 강희제는 세상에는 수많은 인재가 있지만 그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고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쓰기 위해서는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지식과 안목 그리고 폭넓은 사유를 통해 한족과 만주족은 물론이고 서양의 선교사 출신 중에서도 인재를 발굴해 측근에 두고 재주를 펼치게 한 것이다.

강희제는 특히 만주족(滿洲族)과 한족(漢族)의 진정한 통합(統合)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언어적인 통합을 위해 궁중이나 귀족 그리고 지도자 그룹에서도 만주어가 아닌 한자를 쓰게 했다. 또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같은 자리에서 같이 음식을 먹는 것.

강희제는 ‘향음주례(鄕飮酒禮)’ 때 꼭 만주족과 한족이 함께 할 것을 명했다. 반발이 있었지만 강희제는 강력하게 이를 제압하고 만주족의 음식과 한족의 음식을 네 가지로 분류해 한 상에 올릴 것까지 지시했다. 요리법, 색상, 맛과 향 그리고 건강식 등으로 분류한 총 108가지의 레시피가 완성되었고 궁궐로 초대된 만주 귀족과 한족 유학자들은 서로의 음식을 맛보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고 배려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유명한 ‘만한전석(滿漢全席)’의 유래다. 마침내 강희제의 진심이 한족, 만주족 백성에게도 전달되었고 국가 대통합과 태평성대(太平聖代)도 시작되었다.

세종대왕과 강희제의 국가경영 리더십의 요체를 정리해보자.

인재를 발굴하고 대우하여 적재적소에 쓰며, 조세정책을 잘 하며, 국론을 통일하여 국가적 효율을 높인다. 위기발생 전 사전 예방시스템을 잘 갖추고 위기발생 시 위기관리 능력이 잘 작동되도록 한다. 국가기강이 바로 선 가운데 각계각층의 의견이 모아져 생산적으로 작동하며, 늘 장·단기 국가의 백년대계를 도모해 나간다.

국가 리더는 국운(國運)을 좌우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위기와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이 빨라지는 기회가 교차하는 현 상황에선 더 그렇다.

위대한 지도자는 오늘의 현안(懸案)을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때보다 냉철함과 긍정 리더십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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