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찬주 기자
▲ 김찬주 기자
기억은 발 빠르다. 주체가 느낀 감정수준에 따라 쉽게 잊힌다. 어제 저녁엔 무엇을 먹었는지, 이틀 전엔 누구와 만났는지도 희미하다. 도망간 기억이 사소하면 굳이 되새기려 하지 않는다.
 
기억은 그 무게가 무겁다. 애증(愛憎)처럼 가슴을 후려칠 정도의 기억이라면,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좀체 일어날 생각이 없다. 반복된 고통의 기억은 잔인할 정도로 제 무게와 체급을 불린다.
 
국민은 새 일꾼으로 윤석열을 택했다. 정권교체는 “이건 아니다”라는 국민 분노와 “이번엔 믿어보겠다”는 신뢰의 다른 이름이다. 야당의 역전과 정치 경험이 없음에도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례적 20대 대선은 5년 동안 품어왔던 국민의 실망이 점철된 결과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종착지가 50일 앞으로 다가왔다. 본래 이 시기에는 대통령과 당선인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정권이 교체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국민이 야당을 새로 ‘채용’ 했고, 집권 여당과 정부를 ‘해고’ 한 셈이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는 자성과 쇄신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채이배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은 지난 16일 광주 서구 민주당 광주시당에서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탄핵과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초기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인사 실패와 내로남불, 불공정으로 국민의 마음을 잃은 것을 반성하고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도 같은 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선이 한국 정치에 남긴 과제들’ 토론회에서 “그동안 소탐대실했던 것들이 국민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리게 했고, 대선 패배까지 안겼다”며 “집권 여당이 오만하고 방심하면 언제라도 민심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밝혔다.
 
반면, 일부 청와대 참모들은 윤 당선인을 향해 부적절한 언행과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여 논란을 일으켰다. 민주당이 반성의 목소리를 낸 바로 다음 날인 17일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자신의 SNS에 “여기(청와대) 안 쓸 거면 우리가 그냥 쓰면 안 되나 묻고 싶다”며 “좋은 사람들과 모여서 잘 관리할 테니”라고 썼다.
 
탁 비서관의 사견은 윤 당선인의 청와대 이전 공약에 박차를 가하는데 대한 빈정거림 혹은 조롱으로 읽힌다. 윤 당선인의 청와대 반납 공약에 여러 이견도 나온다. 문 대통령도 취임사에서부터 청와대를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로 옮기고, 퇴근길에 시민들과 맥주 한잔 나눌 수 있는 친근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지만, 무산된 점을 잊은 듯하다.
 
그의 발언에 대통령까지 ‘경고’에 나서는 이례적 상황도 연출됐다. 이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께서) 당선인 측의 공약이나 국정운영 방안에 개별적 의사 표현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곧장 다음 날(18일) 탁 비서관은 자신의 글을 삭제했다. 통상 의전비서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대통령을 보좌하는 점으로 미뤄보아, 그의 발언은 문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억에 또 다른 실망을 느끼게 할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청와대는 홈페이지에 5년간 국정운영 이야기를 담은 ‘문재인정부 국민보고’ 웹페이지를 20일 공개했다. 국민보고에는 핵심정책의 추진 성과로 ‘선도형 경제로의 체질개선’, ‘코로나 극복’ 등이 대거 포함됐다. 다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남북 정상회담 장면은 제외됐다. 청와대는 페이지에서 “우리는 지난날의 대한민국이 아니다”고 썼다.
 
“협조하면 ‘빛’ 볼 줄 알았거늘, 어찌 ‘빚’만 보이는가.”, “소상공인·자영업자 다 죽는다, 영업제한 철폐하라.”
 
지난해 12월22일 2년간 이어진 정부 방역기조에 지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총궐기대회를 열고 토로한 목소리다. 의료계는 “K-방역은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 “정부 주도의 방역체계는 통제 불가능”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한국의 일일 확진자수는 전세계 1위다. 국민보고에 올라온 ‘코로나 극복’과는 정반대의 현실이다.
 
국민보고에는 없던 대북문제도 그렇다. 문 정부 내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도발횟수는 총 46회(2017년 5월10일~2022년 3월13일)다. 이 정권이 그렇게 남북관계가 파탄 났다며 비판했던 박근혜 정부 때는 총 37회(2013~2016년), 이명박 정부 당시엔 12회였다. 문 정부가 ‘한반도의 봄’ 운운할 때 실상 북한의 도발은 이전 정부 때보다 늘어난 셈이다.
 
임기 종착점을 50일 앞두고 등장한 ‘문 정부 5년간의 국정운영’ 이야기가 그동안 국민에게 새겨져 왔던 고통과 허무의 기억을 얼마나 상쇄시킬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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