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광복절이란 대한민국에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일본에게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날이니 얼마나 감격적인가? 그 날, 대한민국의 모든 백성들 중에 만세를 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라? 나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본다. 나라가 없다고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렇게 나라를 되찾기를 바랬을까? 아님, 나라가 없으니 자존심 상해서? 압박 받고 멸시 받으니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 그 당시, 우리나라의 나랏님은 백성들을 보호해주고 도와주고 먹을 것을 골고루 잘 나눠 주었을까? 아니면 모래가 섞인 쌀을 나눠주고 그거라도 감지덕지 먹으라고 했을까?

수많은 평민들과 노비들이 나랏님에게 감사하며 살았을까? 아니면 일본이란 이웃나라가 와서 군림하는 편이 자기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고 마음 한켠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복종했을까?
 
얼마 전에 이순신 장군의 한산 대첩을 그린 –한산, 용의 출현-을 보았다. 사졸이 한 몸이 되어 적을 막아내는 용맹한 전투 씬을 보면서 나라에 대한 충성을 느꼈다. 이러한, 나라에 대한 충성은 생래적인 것인가?

다시 돌아가서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소속 의지가 가장 크게 발현된 커뮤니티가 국가일 것이다. 가족에서부터 출발해서 동네, 학교, 종교시설 등에서 인간은 소속감을 느낀다. 그 소속감이 가장 크게 확장된 집단이 나라이다. 물론 아태지역, 북미, 중남미, 유럽 등으로 크게 나누기도 하고 더 크게 지구별이며 우주로 계속 나아가기도 하지만 개개인이 가장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은 국가, 즉 나라인 것 같다.
 
인간은 소속감을 느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안정감을 느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외국인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한국인이 외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도 어렵다. 국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렵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국적으로 평생을 산다.

우리는 국경일 때에나 국기를 집에 걸지만 국기를 항상 집에 거는 나라들도 많이 본다.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까? 부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나 안중근 의사 같은 분을 우리가 존경하는 이유는 자기 한 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위에 놓고 행동했던 분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은 손톱 하나를 집게로 빼는 고문이라도 당한다면 모든 비밀을 다 토설할 것 같다. 그러니 내가 공동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그건 정말로 자신 없다. 하지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가끔은, 조금씩은, 나의 이익을 포기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주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영천 시골에 귀향하고서 뿌듯했을 때는 우리가 가진 땅 조금을 기부 체납해서 동림원 한 가운데 낸 농로로 안마을 차들이 편하게 오고 가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동림원은 3,000평 넓이라 그 밭을 돌아가는 것과 가운데 길로 바로 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더욱이 우리는 동림원을 과일나무 정원으로 조성하면서 그 길을 확장해서 2차선 도로로 만들었다. 안마을 사람들이 엄청 좋아한다.
 
하지만 동림원으로 들어오는 길 몇 미터는 아직도 1차선이다. 그 길은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해당하므로 항상 차량이 분주히 오가는데 그 부분에만 이르면 반대쪽을 살펴야하고 무심코 들어온 차들이 마주보게 될 경우 한 차량이 후진을 해야만 일이 해결된다. 우리가 귀향하기 수년 전부터 그랬다니 거의 10년 동안 그 길의 소유자는 땅을 팔기를 거부했다는 말이다. 이 일이 그 땅의 주인에게는 손톱을 빼는 것과 같은 고문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땅이 크게 쓰임을 받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두어해 전에 땅 주인이 일꾼들을 시켜 그 땅에 배롱나무 몇 그루를 심었지만 돌보지 않으니 잡초가 배롱나무 키만큼씩 자라 보기만 더 흉해졌다.
 
농촌에 빈 집이 점점 많아가지만 그냥 놓아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빈 집 주인 한 사람은 낡은 집 주변을 측량해서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쳤다. 그러지 않아도 좁은 골목인데 동네 차들이 가끔씩 그 벽에 부딪쳐서 수리비를 지불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정작 드물게 그 집에 오는 주인은 우리 집 앞 너른 주차장에 눈치 보면서 자기 차를 주차한다. 담을 두껍게 치다 보니 대문 자리가 좁아졌고 그러다보니 대문을 다 열어도 차량이 들어가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내 눈으로 본 것만 해도 여러 건에 달한다. 영천 시내의 한 은행 건물에 주차하러 가면 이상한 모습이 눈에 띈다. 주차장이 네모반듯하지 않고 한 귀퉁이에 자그마한 낡은 건물이 어울리지 않게 서 있다. 세칭 알 박기를 한 집이라는 것이 눈에 빤하게 보인다. 츳! 안쓰럽다. 양측의 사정이 어떻든 안 된 일이다.

마을의 자랑인 오래된 정자 앞에 2~3층 높이의 큰 창고를 지은 농부도 있다. 본인의 땅에 지었으니 잘못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 회관과 정자 한 가운데 지어서 이제 회관 앞에서는 아름다운 정자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다시 광복절을 생각한다. 빛을 다시 찾았다는 이름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라는 빛이었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닐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공감해 주었으니 지금껏 그 이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나라가 빛이라는 명제에 말이다.

우리가 빛이라고 느끼는 공동체, 그 공동체는 깨알처럼 작은 공동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마을이라는 공동체, 그리고 국가.....

하지만 요즘은 점점 그 행복을 주는 공동체의 범위가 작아짐을 느낀다. 자아는, 이성은 우주로 향하면서 왜 인간의 본성은 작아질까?

가족도 크다면서 자기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이기심만 왜 점점 커질까?

그 옹졸한 이기심이 자신이 사는 마을 공동체를 과연 빛으로 여길 수 있을까?
 
유관순, 안중근 의사의 희생까지는 말고 손톱 뽑히는 고문까지도 말고,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이번 광복절 날엔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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