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의 상부상조·患難相恤의 鄕約DNA와 義人들에 희망

▲ 류석호 교수
▲ 류석호 교수
요 며칠 사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전시(戰時)를 방불케 하는 비상시국(非常時局)이다.

초강력 제11호 태풍 ‘힌남노(HINNAMNOR)’의 내습(來襲)으로 인해 사람과 물자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어들거나 발이 묶였고, 전 국민이 폭우와 강풍의 위력 앞에 벌벌 떨고 있는 모양새다.

태풍 힌남노는 매우 이례적인 태풍으로 강력하고, 크기도 클 뿐만 아니라 다른 슈퍼태풍과는 다른 이동경로와 발생지역 등으로 유례없는 세력으로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기상청의 설명이다. 규모와 세기에 있어서 워낙 크고 강력한 태풍이기 때문에 진로에 상관없이 어느 지역에서나 무조건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전국적으로 순간 최대 풍속 초속 20~30m의 강한 바람과 함께 100∼300mm의 폭우가 내리고 특히 제주도에는 600mm 이상, 남해안에도 4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질 것으로 예보됐다.

5일 오전 민방위복(民防衛服)을 입고 출근한 윤석열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오늘 저녁은 퇴근하지 않고 비상대기하겠다"고 한 발언이 사태의 엄중함을 웅변하고 있다. 대통령은 6일 새벽 대통령실에서 직접 ‘힌남노’ 상황을 점검하고 “태풍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달라”며 관계자들을 독려했다.

오죽하면 재난안전 총괄부처인 행정안전부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대응 수위를 비상 1단계에서 곧바로 3단계로 격상했겠는가.

위험지역 안전조치를 비롯해 인명 대피, 시시각각 변화하는 태풍의진로 등 기상상황과 관련한 정보 공유 등 정부와 지자체 등이 할 일은 태산처럼 많다.

전례없는 슈퍼태풍의 한반도 북상(北上)에 대비해 농산간 어촌은 물론 산업현장, 공항과 항만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인명과 재산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 군경, 주민 등이 비상상황에 돌입한지 여러 날이 되었다. 가히 전 국민 비상근무체제, 동원령을 방불케 하는 조치로 총력(總力)대응에 나선 분위기다.

이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발 이번 태풍이 큰 피해를 주지않고 얌전하게 지나가 주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이같은 바람은 나흘 앞으로 다가온 추석(9월 10일)이 말 그대로 민족 최대의 명절이 되도록 찬물을 끼얹지 말았으면 하는 비원(悲願)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이번 추석은 지난 2020년 1월 20일, 국내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거리두기 없이 맞이하는 3년만의 첫 명절이 아닌가.

가뜩이나 이번 추석은 7개월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대란과 치솟는 물가·환율 등으로 어느 때 보다 어려워진 살림살이에 시름이 깊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대급 태풍마져 가세해 사정이 말이 아닌 것이다.

모처럼 다소 주춤해진 역병(疫病) 상황에 맞춰 마스크를 벗고 오랜만에 가족·친척들과 만나 맘껏 얘기꽃을 피우고 조상님들을 찾아 성묘(省墓)와 차례(茶禮)를 지내는 부푼 기대와 열망이 상당부분 태풍으로 인해 손상(損傷)을 입는 형국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추석 명절 분위기를 태풍이 시샘해서 엉망으로 만드는지 그 속내가 야속하기 짝이 없다.

더욱이 지난 달 수도권을 중심으로 500m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반지하방과 저지대 주민들, 재래시장 등이 큰 피해를 입고 아직 복구가 채 끝나지 않아 거처가 마땅찮고 장사를 할 수 없게 된 서민들의 가슴은 아직 시커멓게 멍들어 있는데 말이다.

초강력 태풍이 온다는 기상 예보에 놀란 과수농가에서는 미리 과일을 따는가 하면, 추석 장보기에 나선 주부들은 태풍 뒤 물량 부족으로 과일 채소류 등의 가격이 더 올라갈 것으로 짐작해 서둘러 제수(祭需)와 식재료를 장만하는 등 발빠른 대처(?)를 하는 모습이다.

전남 나주의 배 재배농가 등 과수재배 농민들은 낙과(落果) 피해 예방을 위해 철골 지지대·방풍망 보강 작업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등 안간힘을 쏟고 있다.

안 그래도 이번 추석은 평년보다 보름가량 빨라서 감을 비롯한 제수용 과일이 충분히 익지 않아 재배농민들은 조바심이 나있다.

안전을 위해 서울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중학교는 6일 등교 수업을 중단하고 고교는 학교 자율에 맡겼으며,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도 등교 중단과 원격수업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부산시는 6일 오전 한때 정상 운행 예정이던 시내버스 운행을 중단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대풍속 초속 40m의 바람이 불고 시간당 30mm 이상의 비가 내리면서 교통사고가 우려됐기 때문.

‘괴물 태풍’에 기업들도 공장을 닫거나 재택근무에 들어가는 등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특히 추석 대목경기에 민감한 택배사들도 이례적으로 "사람 안전이 최우선"이라며 택배기사 안전을 위해 현장의 배송 분류작업과 전국의 대리점에 신선식품류 집하 금지 및 배송애로 지역 집하 차단 조치를 내리는 등 선제 조치에 나섰디.

5일 오후 서울 장위동 재래시장을 찾은 주부 김모(74)씨는 비싼 채소류 가격에 눈을 의심했다. 얼마 전까지 한단에 1000원 하던 시금치가 8000원, 미나리 한단에 1만 8000원, 배추 한포기에 1만원을 넘는 가격에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상인들은 "폭우로 산지 농사가 힘들어지고, 물량이 부족한데다 추석이 빨리 오면서 배추가 점점 귀해지고 있다"고 했다.

오는 9일 시작되는 추석연휴 전이자 제11호 태풍 ‘힌남노’ 상륙을 앞둔 지난 주말, 시장과 마트는 장을 보러 나온 이들로 북적였다. 채소, 과일 등 이미 값이 오를대로 오른 탓에 망설이던 이들은 “태풍이 쓸고 가면 더 오를 것 같다”며 장바구니를 채워갔다.

서민경제에 비상등이 켜졌다. 추석을 앞두고 각종 생활물가가 오른데 이어 공공요금도 줄줄이 오를 예정이며, 통계청 자료에서 8월 소비자 물가지수는 108.62로 작년 같은 달 보다 5.7% 상승했다.

국제유가 하락 영향으로 석유류 오름폭은 둔화했지만 배추(78%), 오이(69.2%) 파(48.9%) 등 채소류가 큰 폭으로 가격이 상승했다. 추석 연휴가 코앞인데 알뜰살뜰한 명절의 지혜가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추석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상인들은 고물가에 손님 발길이 끊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발표한 올해 추석 차례상 비용은 평균 31만 8천원 선. 지난해 대비 6.8%, 2만원 가량 올랐다.

품목별로는 무가 50% 이상 큰 폭으로 올랐고, 소고기와 사과도 10% 이상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추석이 눈앞에 닥쳤지만 소비자는 물론 상인들 역시 명절 대목이 무색해질까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 관광업계 등 곳곳에서 “올 추석은 정말 힘들고 망쳤다”며 아우성과 한숨이 넘쳐나고 있다.

태풍과 고물가 등 미증유의 팍팍한 살림살이에 실망과 좌절만하고 있을 건가.

그래서는 절대 안되고 그럴 여유도 없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라는 말이 괜히 생겨났겠는가.

뭣보다 우리 민족에게는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베품과 나눔의 미덕(美德)이 있다.

두레와 향약(鄕約)에서 돋보이는 상부상조(相扶相助)와 환난상휼(患難相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의 DNA.

지난달 수도권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 현장의 복구 활동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된 데는 전국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10일부터 18일까지 서울·인천·경기·강원·전북·충남 등 6개 시·도의 54개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1만 90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침수피해 현장을 중심으로 복구 활동을 펼쳤다고 밝혔다.

​특히 타 지역 복구현장에 대한 자원봉사센터의 적극적 지원 활동과 전국 각지에서 온 자원봉사자의 열정 어린 수해복구 활동 사례가 눈길을 끌고 있다.

​강원도 강릉시자원봉사센터는 지난 산불대응 봉사활동 시 경기도 광주시의 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살수차 및 밥차를 지원하고 자원봉사자 30여 명과 함께 수해복구 봉사활동을 벌였다.

침수피해를 접하고 경북 포항에서 서울 관악구로 달려와 3일 동안 숙식을 하며 수해복구 봉사활동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는 물론, 영국에서 한국으로 가족여행을 왔다가 서울 동작구 지역에서 이틀간 봉사활동을 한 외국인도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달 8일 밤 8시 50분쯤, 인천에 사는 이효동 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진흥아파트 사거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신호가 길다고 생각하는 찰나 갑작스레 도로에 물이 불어나기 시작해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다. 이 씨는 차량 선루프를 열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물은 순식간에 지붕까지 올라왔고 차가 둥둥 떠올랐다.

사거리 인도로 올라와 숨을 돌리던 이씨는 한 시민이 물에 잠긴 자동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여성 운전자를 구해내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에 이씨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씨가 공개한 영상에는 한 시민이 폭우가 쏟아져 목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운전자를 뒤에서 잡고 헤엄치는 모습이 담겼다. 이씨에 따르면, 이 시민은 운전자를 안전한 곳까지 옮긴 다음 별다른 말없이 그대로 자리를 떴다고 한다.

지난달 5일, 경기도 이천시의 4층짜리 건물에서 불이 나 이 건물 4층에 입주해 있던 신장 투석 전문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 4명과 간호사 1명이 숨졌다. 또 병원 환자 등 44명이 연기에 질식하는 등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한 환자 4명은 혼자서 거동이 원활하지 않은 고령자였다. 숨진 간호사인 현은경(50)씨는 달랐다. 그는 나이도 젊고 움직이는 데 불편이 없었지만 연기가 자욱한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그는 투석 중인 환자들의 몸에서 투석기를 떼내는 등 마지막까지 홀로 움직이기 힘든 환자들을 돌보느라 제때 병원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관계자도 “이 병원에서만 오래 일한 성실한 동료였다”며 울먹였다.

현씨는 지난 20년간 간호사로 묵묵히 일하며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키워왔다. 평소 본인이 힘든 순간에도 내색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지난달 9일 발생한 강원 태백시 황지동 대림4차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이웃을 구한 용감한 시민 김진호 씨.

김씨가 가족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층에서 시작된 불길이 벽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승강기마저 작동이 중지돼 계단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갈 때 3층 주민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귀에 들렸다.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선 김씨는 불길이 번지고 연기가 자욱한 상황에 곧장 자신의 상의를 벗어 입과 코를 먼저 가리고 주저없이 요구조자의 아들 A씨와 함께 안으로 뛰어들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요구조자를 발견하자마자 등에 업고 나왔다.

때마침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에게 인계했다. 불길과 연기가 자욱한 상황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을 구한 김씨에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냐는 태백시 관계자의 질문에 김진호씨는 “그때는 오로지 사람을 구해야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며, 큰일을 한 건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20년 가까이 매일 아침 폐지를 줍는 경기도 안양시 거주 이상일 (76)씨.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서인데, 지금까지 기부한 돈이 1억 원을 넘는다.

이 씨는 교도관으로 33년을 근무하고 퇴직한 뒤 계속 폐지를 주워 19년째 기부를 해왔다.

지난 6월 말,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의 한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던 트럭이 맥주 수십 박스를 쏟아 도로가 아수라장이 됐지만, 시민들의 도움으로 30여 분만에 깨끗하게 정리됐었다.

이 일이 있은지 두달이 경과한 지난 달 12일 오전 11시 30분쯤에도 춘천시 동면의 한 도로에서 트럭 한 대가 커브길을 돌다가 비슷한 사고가 났는데 알고 보니 같은 화물차였다. 다시 한번 시민들이 도왔다. 트럭 운전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줄 몰라했지만 이내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 함께 치우기 시작했다. 현장은 1시간도 채 안 돼 말끔히 정리됐다. 현장 정리가 늦어졌으면 교통 체증과 불편도 발생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시민정신이 빛을 발했다. 

블록체인·핀테크 전문기업인 두나무가 최근 집중호우로 피해를 입은 지역사회를 위해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 20억원을 기부했다.

두나무의 기부금은 주택·상가 침수 피해지역 복구와 구호물품 제공, 이재민의 주거지원 등에 사용되고 있다. 두나무가 올해 재난지원을 위해 구호단체에 기탁한 기부액은 50억원에 이른다.

지난달 유례없는 폭우 피해에 온정을 모은 독지가는 기업인 뿐만 아니라 다수의 연예인과 일반 시민 등 많은 이들이 동참했다.

우리 민족에게는 예부터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혼자 처리하기 어려운 일은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하고 또한 나를 도와준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 협동(協同)정신의 어울림이 활발했다. 어려운 시기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진심으로 서로를 도움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했던 선조(先祖)들의 얼은 우리가 지켜가야 할 소중한 유산(遺産)임에 틀림없다. 두레는 바로 그러한 선조들의 얼을 담고 있는 풍속 가운데 하나이다.

두레의 사전적 의미는 농촌에서 농민들이 농사일이나 길쌈 등을 협력하여 함께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공동노동조직.

두레가 농사꾼들이 농번기에 공동으로 협력하기 위해 이룬 마을 단위의 모임이라고 볼 때, 단체개념과 결부시키면 계(契)·사(社)·회(會) 등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두레는 일제 말기의 전쟁준비로 인한 노동력 고갈, 6·25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 근대화로 인한 산업화·공업화 등으로 존폐 위기를 맞으면서 그 전형적인 형태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 내부의 근본 정신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실례로, IMF시절 국채(國債)를 갚기 위해 온 국민이 동참한 ‘금모으기 운동’이나 ‘새마을 운동’이 그 보기이다.

특히 2007년 12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사고로 약 8만 배럴의 원유(原油)가 인근 해역으로 유출, 대규모 해양 오염사고가 발생하자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태는 모습에서 두레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태풍 힌남노의 통과로 인한 막대한 피해와 어수선하고 뒤숭숭한 추석 명절 분위기를 보듬어주고 위기(危機)를 반전(反轉)시켜줄 힘은 한민족 고유의 두레와 향약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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